파도는 기다리면 다시 온다

[숨&결] 전은지 | 카이스트 항공우주공학과 교수

몇년 전 하와이에 살 때의 일이다. 연구실과 집이 있었던 마노아에서 호놀룰루 해변까지는 차로 10분 거리였다. 하와이로 이사하고 현지 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한 뒤 가장 먼저 도전한 것은 서핑이었다. 전세계 서퍼가 하와이의 파도를 동경한다는데 고작 10분 거리에 살면서 서핑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서핑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①탈 만한 파도가 오는 시간과 장소를 잘 골라 자리를 잡는다.(대개 이미 서퍼들이 와글와글 와 있다.) ②보드 위에 앉아 수평선을 바라보며 파도를 기다린다. ③잡아야 할 파도가 오면 보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파도와의 거리를 살피며 팔을 저어 속도를 낸다. ④제대로 보드에 속도가 붙어 파도가 보드를 치는 순간 보드 뒤쪽이 들리는 움직임을 느낀다. 이때 상체를 들면 보드가 미끄러지는 느낌이 드는데 이때 일어나야 한다. ⑤여러분이 상상하는 서핑 모습이다. 제대로 파도를 잡았다면 이제 옆으로 가든 앞으로 가든 파도를 즐기면 된다.

보통 초보자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③번이다. 파도와 나의 간격을 살피며 팔을 저어 속도를 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속도가 붙지 않으면 파도의 힘을 제대로 받지 못해 파도가 보드를 꿀렁하고 넘어가버린다. 이를 두고 서퍼들은 ‘파도를 놓친다’라고 한다.

코치와 함께 매주 주말 이틀은 바다로 나갔다. 초보자인 내가 파도를 스스로 잡아타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파도에 맞춰 보드 속도를 내려면 코치가 뒤에서 밀어줘야 했다. 이 힘이 더해지면 파도를 잡을 수 있었다. 이 연습을 수도 없이 하면서 3개월쯤 지나가자 코치 도움 없이 혼자서 파도를 탈 수 있게 됐다. 신이 났다. 조금만 더 하면 이제 오는 파도는 죄다 잡아탈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겨났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해 질 녘, 파도 상태가 좋다는 이야기를 듣고 역시나 신나게 바다로 나가 파도를 기다렸다. 저 멀리서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힘 좋은 파도가 오고 있었다. “이건 내 거야”라고 외치며, 몸을 돌려 힘차게 팔을 저어 보드의 속도를 높였다. 보드 뒤가 파도에 맞아 들리자, 상체를 들었다. 보드가 경쾌하게 미끄러지는 느낌이 났다. 재빨리 일어나 자세를 잡았는데, 웬걸. 파도가 꿀렁하고 보드를 넘어가버리는 게 아닌가. 파도를 놓친 나는 힘없이 바다에 몸을 던지곤, 보드에 매달려 울상을 지었다. ‘분명 잡을 수 있었던 파도였는데, 아직도 연습이 부족했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내 옆에서 파도를 기다리던 어떤 할아버지가 있었다.(하와이에서는 아기부터 노인까지 전 연령대 서퍼를 볼 수 있다.) 할아버지는 내게 다가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파도는 기다리면 또 와. 놓쳐도 놓쳐도 파도가 다시 온다는 것이, 서핑의 가장 아름다운 점이지.”

그 뒤 석달쯤 지나 하와이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서핑은 삶을 닮았다. 파도를 잡아타는 그 순간을 위해 보드를 이고 지고 바다에 나가고, 파도를 하염없이 기다리고, 팔을 저어 저 멀리 파도가 있는 곳까지 가고, 나의 파도라고 생각했는데 나의 파도가 아니기도 하고, 그렇게 수십개의 파도를 놓치다 보면 결국엔 나에게 잡혀주는 파도가 하나쯤은 있고….

10분 거리에 바다가 있지 않은 이상, 더는 주말 서퍼 노릇은 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연구가 마음같이 풀리지 않는 어느 새벽, 하와이의 눈부신 바다를 생각한다. 서핑의 정점은 멋지게 파도를 잡는 순간이 아니라, 파도를 계속 놓치며 다음 파도를 기다리는 순간에 있었다. 내 연구의 정점도 문제를 푸는 순간이 아니라, 문제를 풀기 위해 계속 시도하는 중에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려 볼 일이다. 기다리면 다음 파도가 오고, 그걸 놓치면 그다음 파도가 온다. 바다에 머무는 시간만큼 만나는 파도도 많아지기 마련이다. 이번 파도를 놓쳤다면, 다음 파도는 나의 파도다.

2023-03-29T09:44:40Z dg43tfdfdg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