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함과 설렘이 공존하는 '위로의 DJ', "청취자가 나의 마지막 가족"

그는 아픈 아이를 따뜻한 손으로 보듬는 엄마 같다가도, 어떤 때는 나 대신 무엇이든 책임질 것 같은 언니처럼 든든한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내일이 그리워 오늘 잠 못 들게 하는 연인의 표상 같기도 하다.

그 어떤 역할에도 꼬리표처럼 붙은 '설렘'의 감정은 그를 상징하는 키워드일지 모른다. 성시경이 "잘 자요"하고 나긋한 클로징 멘트를 구사했다면, 그는 "(내일도) 함께 걸어요, 우리"하며 청취자 가슴 한복판에 설렘의 비수를 꽂는다.

주어와 술어가 도치된 짧은 문장에서 그는 수많은 감정과 해석을 생성해 낸다. 작은 떨림의 목소리로 시작해 (당신의 손을) 놓지 않겠다는 약속과 다짐의 언어로 마침표를 찍는 클로징 멘트는 그와 8년째 동행한 청취자들에겐 익숙하지만, 늘 신선한 '심쿵'의 언어로 수렴된다.

"제가 '설렘의 DJ'라고요? 그렇게 봐주시면 고맙죠. 그런 표현을 들으니, 좋은 진행자는 어떤 진행자일까를 또 한 번 생각하게 되네요.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 방송일지 모른다'는 마음으로 다가가서 그런 게 아닐까요?"

탤런트 겸 DJ 김현주(59)가 올해 라디오 DJ 40주년을 맞았다. 1981년 KBS 8기 공채 탤런트로 방송계 발을 들였지만, 꾸준한 활동과 인지도는 DJ에 집중됐다. 그의 첫 DJ는 1984년 가수 김창완과 공동 진행을 맡은 KBS 제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였다.

그는 40년 소회에 대해 "떠오르는 샛별로 DJ에 처음 발탁됐을 땐 말 그대로 천둥벌거숭이여서 웃고 깔깔대기 일쑤였다"며 "지금은 되레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다"고 했다. 그의 '조심스러운 행보'는 2016년부터 8년째 진행하는 '김현주의 행복한 동행'(CBS 음악FM 93.9MHz, 오후 8~10시)을 통해 더욱 도드라진다.

"CBS(기독교방송)에는 청취층이 정말 다양해요. 건설노동자부터 교수·의사까지 다양한 직업군, 다양한 삶의 애환을 짊어진 이들이 넘쳐나요. TV 드라마나 유튜브는 말이나 행동이 기록에 남지만, 라디오는 허공으로 날아가니 제가 말해놓고도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때가 있어 말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되죠. 약도 되고 독도 되는 말을 다시 '배우면서' 비로소 방송이 무엇인지 알게 됐어요."

전에는 빨랐던 말의 속도도 늦췄다. 2시간 동안 쏟아지는 5000개 문자에는 오늘 승진으로 기분 좋은 분, 회사에서 잘린 분, 암으로 투병하시는 분 등 별의별 사연의 주인공이 망라됐다. 그래서 한마디 하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고 신중하게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연들이 있어요. 저는 즐거운 얘기를 이어가는데, '내일 어쩌면 방송 못 들을지 몰라요. 오늘이 마지막이에요.'하는. 그런 분들에게 제가 당신 옆에 있다는 걸 어떻게 얘기해 줄까 고민하죠. 많은 청취자들 앞에선 표정 숨기고 말하지만, 아프고 힘든 사연의 주인공에겐 음악 나가는 동안 개인적인 답장을 써요. '지금 이 순간이 전부가 아니에요. 모든 건 지나갑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그때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수 있으니 조금만 참아요.' 같은 내용의 문자를 보내요."

각자 저마다 위치에서 자신의 인생을 얘기할 때, 김현주는 그들의 '옴니버스 영화'를 한눈에 바라보며 '오리의 자맥질'을 멈추지 않는다. 수면 위 오리의 우아한 자태와 수면 아래 오리의 멈추지 않는 발차기의 묘한 대비처럼 청취자와 얘기할 땐 따뜻하고 우아한 벗으로, 음악이 나가는 동안엔 아픔과 슬픔의 위로자로 숨 가쁘게 동행한다.

그가 방송을 대하는 자세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뜻함을 건네고 싶다"는 것이다. 가장 큰 계기는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동안 가족 모두 잃은 상실의 경험 때문. 아버지는 4년 전, 오빠는 2년 전, 어머니는 올 2월 작별 인사를 했다. 특히 다운증후군을 앓았던 오빠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 땐 금세 눈시울을 붉히며 울음을 터뜨렸다.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사랑하는 세 사람을 모두 보냈는데, 제게 남은 가족은 이제 청취자뿐인 셈이죠. 그래서 어떤 사연 하나도 가볍게 보기가 힘들어요. 모두 제 얘기 같아서요. 우리 오빠는 태어날 때부터 그 병을 앓았지만, 가족 모두의 사랑을 받아서인지 자신의 장애를 트로피라고 여겼어요.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밝고 건강하게 살았죠. 우리 청취자들도 이런 기운을 받으면 좋겠어요."

'행복한 동행'은 동 시간대 다른 프로그램에 비해 청취율이 압도적이다. 메인 뉴스, 야구나 축구 경기가 있는 오후 8시 TV 프로그램과 경쟁해도 뒤처지지 않는 진가를 발휘한다.

"예전에는 라디오도 일종의 연기라고 보고 탤런트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지금 와서 보니까, 드라마는 말 그대로 '연기'를 하는 것이고, 라디오는 그냥 나를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더라고요. 그렇게 보여줄 수 있었던 건 서로가 가장 편하고 서로에게 녹아있었던 8년이라는 긴 시간 덕분 아니었을까요. 가족이라는 느낌이 있으니,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도 큰 것 같아요."

인터뷰 말미. 다시 "함께 걸어요, 우리"라는 '설렘'의 클로징 멘트가 궁금해졌다. 기자도 저녁 9시 홍제천변을 달리면서 듣는 애청자로서 이 멘트를 듣기 전까지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는 일화를 전했다.

"누가 걷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 다가가 팔짱을 끼고 동행할 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을 받잖아요. 그래서 결국 '우리'가 되는 거고요. 방점은 '우리'에 있는 셈이죠. 우리가 단지 걷기만 하는 건 아니에요. 같이 웃고 먹고 즐기고 슬퍼하고 있어요. 그건 '우리'가 '함께 걸을 때'만 유효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설레는 순간도, 영원한 건 아니잖아요. 내일부터 '각자 걸어요' 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그렇게 제 마음 모두를 쏟아붓는 것인지도 몰라요."

청취자들은 매일 보이지 않는 창 너머로 그의 안부를 살핀다. 진행자의 목소리만 듣고 "언니, 무슨 일 있으세요?"하고 묻는다. 김현주는 "그 얘기만 듣고도 눈물이 난다"며 "내가 청취자라는 가족에게 사랑받고 있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인터뷰를 마친 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기자의 뒷모습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발걸음을 돌리는 그도 가족의 느낌이 무엇인지 증명했다. 가족의 정의와 의미를 느끼게 해준 그가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웠다.

2024-04-29T21:15:54Z dg43tfdfdg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