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서도 마음의 눈을 잃지 마

어렸을 때부터 고지식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고지식에 쓰이는 ‘굳을 固(고)’만 봐도 이 단어가 얼마나 한심한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생각이나 입장이 이미 과거가 돼버린 시간에 갇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딱한 모습 아닌가요. 초등학교 1학년 때 고지식의 최고봉이었던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담임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자리를 비운 채 몇십 분 동안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자습 시간’이라고 했겠죠. 갑자기 화장실에 가고 싶었습니다. 입학하자마자 선생님은 수업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와야 할 때는 손을 들고 허락을 받으라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허락을 해줄 사람이 없어지자 대혼란에 빠졌습니다. 본능보다는 교사의 지침에 따르는 것이 우선이라고 배웠기에, 참고 참다가 결국 바지에 실례를 하고야 말았습니다.

부끄러운 에피소드를 굳이 털어놓는 이유는, 그 이후 몇십 년 동안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해 왔다는 걸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규칙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유연한 대처법을 배우는 것,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상상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인들은 내 성격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고 있는 ‘고지식함’보다는 어른이 돼서 훈련해 온 ‘자유로움’을 알아볼 때가 있는데, 내게 그 자유로움이란,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훈련을 뜻합니다. 아, 오해가 있을 수 있겠군요. 나는 타인의 다양성을 수용하는 것보다 나의 다양성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뜬구름 잡기에 가까운 느슨한 사고부터 조직 논리를 그대로 따르는 충성스러움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이는 성격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다양성을 훈련하는 일은 가능성을 넓혀보는 일이기도 합니다. 좋은 조건에 놓여있든, 절망적 상황에 처해 있든, 어쩌면 희망이 피자 한 조각만큼도 안 남아 있을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상상하는 것입니다. 사실 긍정적 상황은 별로 상정하지 않습니다. 기쁠 테니까요. 문제는 불운이 닥쳤을 때입니다. 공포를 상상해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던 내게 가장 큰 두려움은 뜻하지 않은 질병이나 사고로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을까. 정작 시련의 한가운데 들어서면 이런 사고훈련도 별로 도움이 안 될 수 있지만요.

올리버 색스의 ‘마음의 눈’(이민아 옮김, 알마)은 절망을 상상할 때 큰 위로를 줬습니다. 뇌과학자가 수집한 사례니만큼 이 책엔 시각적 기능을 잃은 여러 가지 사례가 등장합니다. 녹내장 같은 안구의 질병으로 ‘심맹’(완전히 안 보이는 상태)에 이른 사람도 있고, 시력은 살아 있지만 뇌의 질병으로 글자를 읽을 수 없게 됐거나 사물을 인지하지 못하는 환자도 나옵니다.

 

어느날 올리버 색스는 릴리안이라는 한 피아니스트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습니다.

“색스 박사님, 제가 겪는 (아주 특이한) 문제를 한 문장으로, 비의학적 용어로 말씀드리자면 읽지를 못합니다. 음악이든 뭐가 됐든 읽지를 못해요. 안과에서는 시력 검사판의 맨 아랫줄까지 한 글자씩 전부 읽을 수 있어요. 하지만 낱말은 읽지 못하고, 음악에서도 같은 문제가 있습니다. 박사님께서 시간을 내어 저를 봐주신다면 정말로 기쁘겠습니다.”

릴리안은 뇌의 후방피질 위충증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연주회 도중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21번 악보를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외우고 있던 곡이라 위기는 모면했지만 점차 악보를 읽는 능력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3년 뒤엔 글을 읽을 수 없게 되었고, 이듬해엔 사물을 인지하는 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시각적으로 “먹을 것이 없어지자” 그는 많은 감각을 청각에 의지하게 되었습니다. 한 번만 듣고도 새로운 곡을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상태는 계속 나빠져 갔습니다. 릴리안의 ‘실인증’은 퇴행성 뇌질환이지만 통상적인 알츠하이머와는 달랐습니다. 기억력, 지능, 통찰력, 개성은 최후까지 보존되었습니다.

올리버 색스가 릴리안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는 앞에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어진 상태였습니다. 청각은 여전히 튼튼하다는 말을 듣고, 올리버 색스는 릴리안이 직접 편곡해 쳤던 하이든 4중주곡을 청했습니다. 릴리안은 자리에서 일어섰으나 피아노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고, 남편의 도움으로 간신히 피아노 앞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첫음을 잘못 쳤습니다. 혼란과 불안에 빠진 릴리안은 울음을 터뜨렸으나 건반을 짚으며 이내 안정을 찾기 시작했고,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었습니다.

“높이 울려퍼지다가 서서히 녹아들어 안으로 휘감기는 소리였다. 릴리안을 연주하면서 허공을 응시했고 입으로는 선율을 흥얼거렸다. 릴리안이 전에 보여주었던 힘과 감정이 온전히 실린 절정의 예술적 연주 속에서 하이든의 음악은 격랑, 음악적 격론에 휘말려 들어갔다. 연주가 피날레를 향하고 마무리 화음이 울리면서 릴리안이 말했다. 간결하게. ‘다 용서했어.’”

‘다 용서했다’라는 대목에서 눈물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그의 용서는 사랑이었습니다. 나의 정체성을 이루었던 핵심 기능을 상실하더라도 스스로를 저버리지 않고 최후의 나를 지키겠다는 마음, 나를 향한 온전한 헌신이었습니다.

4년 전, 나는 ‘삐삐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라는 책을 썼습니다. 제목이 좀 틀렸습니다. 건넜다, 가 아니라 건너고 있다, 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조울병의 사막은 오아시스를 만날 가능성이 콩알만해 보일지라도 어릴 적부터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삐삐의 힘을 믿으면서 걸어갈 힘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이제 삐삐언니가 또 다른 사막으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일단 쉼표를 찍겠습니다. 마침표가 아니란 걸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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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언니의 마음책방은?

책을 많이 읽으면 똑똑해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새로 알게 된 것보다 잊어버리는 게 더 많기 때문에 지식 총량이 늘어나는 건 잘 모르겠지만 이해력이 좋아지는 건 분명합니다. 나를 위로하고 타인을 격려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지요. 좀더 씩씩하게 살아가고 싶은 삐삐언니가 책을 통해 마음 근육을 키우는 과정을 여러분과 함께합니다.

 

이주현 기자 [email protected]

 

2024-07-05T04:56:09Z dg43tfdfdg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