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같은 5개월'...환자들은 왜 거리로 나왔나

"우리에겐 50년 같은 5개월이었습니다. 의정 갈등에 우리 환자들은 죽어가고 있습니다. 지난 장기간 파업으로 내 딸이 치료도 못 받고 죽을까 봐, 모든 것이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지난 2월 19일 전공의 파업으로 시작된 의료 공백 사태가 다섯 달 가까이 이어지면서 결국 환자와 보호자들이 직접 거리에 나왔다.

4일 오전 서울 보신각 앞에선 환자단체들의 첫 대규모 시위가 열렸다. 한국유방암환우총연합회, 한국환자단체연합회, 한국희귀·난치성질환연합회 등 92개 환자단체는 '의사 집단휴진 철회 및 재발 방지법 제정 환자촉구대회'를 열고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라고 의료계와 정부를 '양쪽 모두'에 목소리를 냈다.

이날 집회에는 30도에 육박하는 날씨에도 환자와 보호자 등 300명(경찰 추산)가량이 모였다. 치료를 받는 환자와 간병을 하는 보호자들이 거리 집회에 나서는 건 이례적이다.

이들은 그동안은 주로 간담회 등을 통해서 의견을 밝혀왔다. 그동안 지난 5월 법원은 의대 증원 집행정지 신청에 '각하·기각' 결론을 내리고, 정부가 내년도 정원을 확정했다.

하지만 의료진의 집단휴진이 이어지고 의대 증원을 놓고 의정 갈등이 장기화 조짐을 보이자, 결국 환자와 환자 가족들이 직접 거리에 나섰다.

분홍색 옷을 입고 시위에 나선 이들은 '의료정상화 재발 방지법'이라는 문구가 쓰인 팻말을 들고 의료계와 정부를 향해 '치료받을 권리를 보장하라'고 촉구했다.

이들은 "집단휴진 철회하고 의료 공백 해소하라", "환자 없이 의사 없다. 집단휴진 중단하라", "반복되는 의료 공백 재발 방지 입법하라" 등 구호를 외치기도 했다.

환자단체연합회는 성명서에서 "정부와 전공의·의대 교수의 갈등이 136일째를 맞았다"라며 "이 날씨에 우리를 이 자리에 서게 만든 정부와 전공의·의대 교수는 지금, 이 순간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라고 비판했다.

이들은 또한 "정부는 여론을 앞세워 환자들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전공의들을 몰아붙였고 의사들은 환자를 향해 '정부 탓을 해야지, 왜 의사 탓을 하냐'고 날을 세웠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암과 중증질환, 희귀난치성질환, 만성질환으로 아파본 당사자이자 사랑하는 사람이 아플 때 곁을 지킨 환자 가족으로서, 누구도 이런 일로 고통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강조했다.

이날 집회에는 선천성 희소질환인 코넬리아드랑게 증후군을 앓고 있는 박하은(23) 양와 보호자 김정애(68) 씨도 참석했다.

의료공백으로 인한 진료 거부를 경험하며 삭발 투쟁에 나서기도 했던 김 씨는 발언대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지한 엄마지만, 분명한 것은 갈등에 우리 환자들의 생명이 볼모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4월 췌장암 말기 최종 판정을 받았다는 김선경(62) 씨는 의료 파업 속에서 암 검사를 받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밝혔다.

"암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섯 개 병원을 돌아다니면서 검사를 받았는데 우선 예약부터가 너무 힘들었고요. 검사하고 판정하는 시간도 지연되고 기본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더라구요."

김 씨는 "환자 입장으로서 정부나 그 다음에 의사 선생님들이 개인적으로 이제 추구하고 하시는 바가 입장이 있겠지만, 일단 먼저 환자를 먼저 생각해 주시는 마음으로 이제 빨리 해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고 호소했다.

4년째 식도암 투병 중인 오재훈(70) 씨는 "수술해야 하는데 연기되거나 못 받을 수도 있다는 그런 불안감 때문에 나를 비롯해 암 환우들이 정신적으로 굉장히 고통을 당하고 있다"며 "소방대원이 불이 났는데 파업하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인슐린 결핍에 의한 1형 당뇨를 앓고 있는 아들을 위해 나왔다는 차재환(54) 씨 역시 "진료를 못 받거나 처방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며 "환자를 볼모로 삼지 말고 대화로 문제를 좀 해결해달라"고 말했다.

그는 "사회적인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정책을 추진한 정부의 일차적인 문제가 있다"면서도 "결국은 환자를 볼모로 또 그것에 대응하는 의료계도 커다란 문제가 있다"고 정부와 의료계 모두를 비판했다.

'원하는 건 치료받을 권리, 그뿐'

환자단체들은 의료계와 정부, 국회에 무기한 휴진 철회, 상급종합병원 전문의 중심으로 개편 및 전공의 수련 환경 개선, 재발방지법 제정 등 세 가지를 요구했다.

특히 재발방지법은 추후 의료인 집단행동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응급실·중환자실·분만실 등 생명과 직결된 '필수의료'의 경우는 단 한시도 중단 없이 제공되도록 관련 법률을 입법하라는 취지다.

이번에 시위를 주관한 한국환자단체연합회의 안기종 회장은 BBC 코리아에 '공백을 최소화하고 있다'는 병원들의 방침이 어불성설이라고 비판했다.

"백혈병이라든가, 각종 항암치료나 이식의 부작용으로 안과 질환, 피부 감염 등이 많습니다. 이런 중증 환자들은 해당 암 외에도 다른 과와 협진이 필요한데 관련 과에서 부작용 진료를 받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이게 이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예요."

안 회장은 또한 "2중, 3중의 안전장치가 있어야 의료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데 지금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항암제 진료 관련해서 원래 전문의가 하던 영역을 다른 인력이 하고 있다"며 인력이 부족하면 또 이게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장기간 의료 공백은 중증 환자뿐 아니라 중등증의 환자에게도 큰 위험 요소"라고 했다. 중등증의 환자는 당장 수술이나 입원을 해야 하는 상황은 아니지만 계속해서 정기적인 진료가 필요한 환자를 뜻한다. 그는 중등증 환자들의 호소가 특히 많이 들려온다고 했다.

"신규환자도 제한적으로 받는 상황에서 중증도 환자들의 진료와 치료가 계속 밀립니다. 불안해하며 불편감을 호소하는 환자들의 목소리가 정말 큽니다."

안 회장은 환자단체들이 이번 시위 후에도 최종적으로는 '필수의료 종사자의 집단행동 재발방지법'이 발의돼 입법되기까지 활동을 이어 나갈 예정이라고 했다.

안 회장은 "환자의 권익 증진에 관한 법률이 있었으면 이런 장기간의 집단 휴진으로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인데 정부는 손을 놓고 있다"이라며 "앞으로 환자 중심 보건의료 환경을 만들 수 있는 입법 제도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우린 정부 편도, 의사 편도 그 누구 편도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치료받을 권리, 그뿐입니다"

한편,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지난 1일 기준 211개 수련병원 전공의 총 1만506명 중 사직한 전공의는 51명(0.49%)을 기록했다. 전체 전공의 중 출근자는 981명으로 출근율은 9.3%에 불과하다.

의료계는 다시 집단행동에 나설 조짐이다. 세브란스병원 교수들이 지난달 27일부터 개별적으로 휴진을 이어가는 가운데 아산병원은 이날 진료 축소에 들어갔다.

고려대병원(12일), 충북대병원(26일)도 진료 재조정 및 휴진에 들어갈 예정이라 의·정 갈등은 더 장기화할 전망이다.

2024-07-04T08:47:37Z dg43tfdfdg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