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주재한 추모식... 프랑스에 '유가족 시위' 없던 이유

세월호 10주기다.

우린 여전히 회한과 원통함, 집단적 죄책감으로 이 사건을 기억한다. 세상 어디에서나 예기치 않은 대형 인명 사고는 발생할 수 있지만, 이 사건이 여전히 큰 사회적 고통으로 남아있는 것은, 아직도 왜 그들을 구하지 않았는지, 왜 그토록 많은 승객들이 빤히 만인이 보는 앞에서 죽어가야만 했는지에 대한 기초적 해답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는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유족들은 그 긴 세월 가족을, 자식을 잃은 피해자인 동시에 꿈적하지도 않는 정부를 향해, 법정을 향해, 진실을 추궁하는 투사로 살아와야 했다. 참사 책임을 지닌 정권이 탄핵되고 새 정권이 들어서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진실을 묻어 두고 숱한 억측과 의혹 속에 방치한 이 같은 선례는 2022년 이태원 참사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정부는 심지어 추모를 봉쇄하고, 방해하고, 유족들을 적대시했다. 언론 보도는 철저히 정부의 방침을 따라 진실을 봉인하는데 협력했으며, 유족들은 또 다시 전사가 되어 거리에 나서야만 했다.

이미 발생한 비극이 더 큰 사회적 분열과 상처로 진화되는 과정을 우린 반복해 왔다. 그렇다면 어떤 다른 방법이 있을까? 어떻게 하면 참사를 맞은 사회가 슬기롭게 슬픔을 극복할 수 있을까? 2차대전 이후, 프랑스에서 발생한 최대의 참사로 기록된 2015년 파리 테러의 사례를 통해 그 방법을 엿보고자 한다.  

2015년 11월 파리 테러

 

총 130명의 사망자와 413명의 부상자를 발생시킨 테러 사건이 2015년 11월 13일 파리에서 발생했다. IS세력임을 자처하는(그러나 모두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 국적자들인 이민2세) 3개 그룹의 테러리스트들은 파리와 파리 외곽의 서로 다른 지역에서 동시 다발로 테러를 벌였다. 그 첫 번째는 파리 북부 생드니 축구경기장 부근에서 벌어진 자폭 테러이며, 두번째는 파리 시내 카페 테라스에 앉아 금요일 저녁의 여유를 누리던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총격, 그리고 9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킨 대중 음악 공연장 바타클랑 진입 테러가 그것이다.

이날 밤 9시 50분, 무장 테러범 3인이 미국의 헤비메탈 그룹인

의 공연이 벌어지고 있는 바타클랑 극장에 들어가 총격을 가하며 순식간에 9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테러가 시작된 지 10분이 채 되지 않아 경찰들이 현장에 도착, 진입했고, 첫 번째 테러범을 사살했다. 그러나 나머지 두 테러범은 20명의 관객을 잡아 2층으로 올라가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2시간 넘도록 대치하던 끝에 사살되었다.

당시 극장에는 1500여 명의 관객들이 있었다. 이들 중 부상을 입은 사람들은 인근 16개 병원에 신속히 실려 갔으며, 공연을 하던 가수들은 모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즉시 현장에 도착한 대통령

테러가 있던 날,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은 첫번째 테러 목적지였던 생드니 경기장에서 프랑스-독일 친선 축구 경기를 관람하고 있었다. 테러범들은 관중들을 포함, 대통령을 노렸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은 철통 보안 중이던 경기장에 진입하는 데 실패했고, 그러자 그 부근에서 자살폭탄조끼를 터트려 삶을 마감한다. 이 과정에서 시민 1명도 함께 사망했다.

대통령은 경기 관람 도중, 시내 일대에 테러가 발생했다는 보고를 듣고 조용히 경기장을 빠져나와 대책회의에 참석하였으며, 회의 직후, 테러범과 경찰이 대치 중인 바타클랑 극장으로 달려간다. 도착 즉시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들의 만류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는다. 새벽 1시 반경 모든 상황이 종료될 때까지 현장을 지켰고, 그 앞에서 당시까지 확보된 사건의 전말을 직접 기자들 앞에서 브리핑한다. 비록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긴 하였으나, 올랑드 대통령은 사건 발생 당일, 적극적으로 현장에 임하여, 상황을 진두지휘하는 국가 수장의 모습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날 테러의 배경에는 4년에 걸친 시리아 내전에 개입해온 서방 세력(미국과 그 우방국들)과 그 사이 시리아를 장악한 급진 이슬람세력 IS 와의 갈등, 시리아 내전이 발생시킨 수십만 난민의 유입, 이로 인해 증가된 이민자들과의 갈등이 깔려 있었다. 올랑드는 테러 후 이틀째 되는 날부터 전투기를 출격시켜 IS지휘 본부와 훈련 센터 등에 폭격을 가했다. 악을 악으로 응징하는 이러한 행위는 끝없는 악순환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고, 시민 다수가 원하는 방향도 아니었지만, 대통령으로선 신속한 응징이라는 버튼을 누르며, 또 다른 테러 위협으로부터 자국을 지키겠다는 결단을 행한 셈이다.

밀물 같은 추모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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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4-16T22:11:16Z dg43tfdfdg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