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촬영이 벼슬이냐… 주민은 벽돌을 집어들었다

드라마가 아니었다.

4월 26일 새벽 3시쯤이었다. 서울 종로 창신동 주택가에서 tvN 새 드라마 ‘무인도의 디바’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대세 배우 박은빈이 주인공을 맡아 일찌감치 화제가 됐지만, 더 큰 화제는 그날 생겨났다. 어디선가 벽돌이 날아든 것이다. 대본에는 없던 일. 인근에 거주하는 한 40대 남성이 집어 던진 것이었다. 경찰 조사에서 이 남성은 “촬영으로 발생하는 빛과 소음에 짜증이 났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등의 진술을 했다고 한다. 제작사 측은 “스태프 한 명이 다쳐 치료를 받았다”면서 “추후 촬영 현장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겠다”고 밝혔다.

◇민폐가 도를 넘었다

중견 배우 정우성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ENA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제목과 상반되는 쓰레기 논란에 휩싸였다. 지난달 31일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고발글 때문이었다. “촬영하러 왔으면 치우고 가야지, 누가 치우냐.” 글과 함께 올라온 사진에는 먹다 버린 커피, 물통, 빵 봉투, 담배꽁초, 드라마 제목이 적힌 대본이 골목길에 함부로 나뒹굴고 있다. “남의 동네에서 뭐하는 짓이냐” “최소한의 양심은 갖고 촬영하라” 같은 댓글이 민심을 보여준다. 제작사는 “철저히 주변 정리를 진행하겠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채널 불문, 민폐는 계속되고 있다. 박보검·아이유 주연의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고창 청보리밭 축제장을 촬영장으로 사용하면서 길을 막고 스포일러 방지를 이유로 관광객들이 꽃 사진을 찍는 것까지 통제하다가 구설에 올랐다. “전세 낸 듯 길 막고 사진 찍지 말라는데, 다수의 관광객이 왜 피해를 입어야 하나.” 박소담·서인국 주연의 티빙 드라마 ‘이재, 곧 죽습니다’의 경우 거리 촬영 도중 스태프가 행인과 사진 촬영 문제를 두고 실랑이하다 비속어를 내뱉어 논란이 일었다. 올해만 벌써 6건. 지난해부터 따지면 ‘마스크걸’(드라마) ‘7인의 탈출’(예능) 등 알려진 것만 10건에 달한다.

◇연예인? 어쩌라고요

한국영상위원회 ‘영상물 촬영 지원 매뉴얼’에 따르면, 야외 촬영을 하려면 제작사는 차량 통제나 주차 협조 등의 촬영 지원 신청서를 2주 전쯤 해당 지역 영상위원회에 보내야 한다. 이후 관할 행정기관 담당자 등의 허가를 얻어 촬영이 이뤄지는 식이다. 그러나 이를 건너뛰는 경우도 상당수다. 현실적인 여건상, 촬영은 시간 싸움이기 때문이다. 충분한 협의가 어려우니 치고 빠지기 전략이 나온다. 해양 보호 구역에 제대로 된 인허가 없이 세트장을 짓고(’솔로지옥3′), 촬영 차량으로 가정집 대문을 막고(‘찌질의 역사’), 경찰이 출동할 정도의 소음을 새벽까지 유발(’하트시그널4′)하는 것도 그런 맥락에 기인한다.

공공장소에서 주민들이 촬영에 협조해야 할 의무는 사실상 없다. 어디까지나 배려다. 게다가 세상이 변했다. 방송국이 세 곳뿐이었을 때, 연예인 한 번 보는 게 소원이던 때, 그리하여 TV 촬영이 곧 동네의 자랑이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도심의 경우 촬영으로 얻는 이익은 극히 드문데, 교통 혼잡 등 일상의 불이익은 상당하다. 촬영 스태프가 조금만 고압적으로 굴면 곧장 “나라 구하는 것도 아니면서 웬 유세가 그리 심하냐”는 불만이 폭발하는 이유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에 대한 민감도가 여느 때보다 높아졌으나 촬영 실태는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 지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열받네… 폭발한 시민들

촬영 민폐 현장을 발 빠르게 전달하며 ‘불매’ 동참을 권유하는 움직임도 거세지고 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방송 촬영 갑질 대응 방법 공유함’이라는 글이 올라왔다. 드라마 촬영을 이유로 도로를 막길래 따졌더니 오히려 짜증을 내 눈이 뒤집혔다는 한 남자가 경찰서 및 구청에 질의한 결과를 요약한 것이다. “촬영팀이 도로에서 교통 통제를 하네? 그런데 경찰이 없다? 이거 불법.” 그러니 무례하게 굴면 후회하게 해주라는 일종의 ‘팁’이다. ‘영상물 촬영 지원 매뉴얼’에도 “현행법상 차량이나 사람이 통행하는 도로에서의 촬영을 공식적으로 허가하는 조항은 없다”고 명시돼있다. “정식으로 양해 구하면 협조할 텐데, 자기네가 상전인 줄 안다.”

2020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 터스틴·어바인 주민들이 SBS 예능 ‘집사부일체’ 제작진을 검찰에 고소하는 일이 벌어졌다. 제대로 된 허가를 받지 않고 이른바 ‘도둑 촬영’을 진행했다는 것. 동의 없이 주민 얼굴을 방송에 노출했다거나, 촬영으로 거주지 시설이 망가졌다는 등의 주장이었다. 반면 SBS 측은 관련 절차를 모두 준수했다고 반박했다. 소송 결과는 무혐의(증거불충분)로 알려졌다. 그러나 한국식 촬영 문화에 경각심을 주는 사례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방송협회장 강명현 한림대 교수는 “방송의 촬영 범위가 세계로 넓어지면서 한국보다 훨씬 민감한 현지 반응에 더 자주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촬영·제작 윤리에 대한 깊은 고민이 요구되는 시점”이라고 말했다.

◇“유튜버는 더 심해요”

서울 서촌에서 오락실을 운영하는 설재우(42)씨는 분통을 터뜨리는 일이 잦아졌다. 최근에도 모 인기 걸그룹이 해당 오락실을 찾았다. 5~6명의 유튜브 영상팀과 함께였다. “사전 동의도 구하지 않고 안하무인격으로 들이대는데 만성 피로를 느끼고 있다.” 이들이 당당할 수 있는 근거는 한결 같다. “홍보해주잖아요.” 그러나 설씨는 단호했다. “길 막는 건 기본이고, 가게 앞에 ‘밥차’ 세워 놓고는 음식 하수구에 버리고, 거의 골목대장이다. 도움 안 되니까 제발 오지 마시라.”

가게에 유튜버 출입을 금하는 ‘노튜버존’이 생겼고, 백화점 및 대형마트에서도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있다. 생방송을 진행하며 매장 안에서 춤을 추거나, 다른 고객의 초상권을 침해해 불편의 목소리가 커졌기 때문. 사고 위험도 높다. 반면 제지는 쉽지 않다. 유튜버에서 곧장 ‘블랙 컨슈머’로 돌변하니까. 지난달 한 마트 직원이 호소문을 올렸다. “유튜버 분들 촬영 오시면 아찔합니다… (민폐) 사례가 공문으로 내려와서 주기별로 교육받아요. 제발 다른 사람 안 나오게 촬영해 주시고, 장 보는 영상 찍으셨으면 냉동 식품만이라도 냉동실에 넣어주시고, 미션한다고 춤추거나 카트로 빨리 달리는 위험한 행동은 자제해주세요.”

◇답례품에 온천 여행까지

사려 깊은 제작진도 다수 존재한다. 촬영 기간에 다소 여유가 있는 영화의 경우 드라마나 예능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 수년 전 잠실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던 직장인 한모(36)씨는 “누군가 벨을 누르기에 나가봤더니 ‘며칠 간 단지에서 야간 촬영이 있을 예정이니 잘 부탁드린다’면서 영화 제목이 새겨진 수건을 건네주더라”며 “창문으로 조명이 들어오긴 했지만 양해를 구하려고 집집마다 찾아다녔을 정성을 생각하니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영화 ‘곡성’은 무속 신앙을 다루기에 소음이 큰 촬영이 많았다. 특히 무당으로 출연한 배우 황정민이 밤새 굿판을 벌이는 장면은 주민들의 고막에 가해질 심각한 충격이 익히 예상되는 바였다. 그리하여 나홍진 감독이 낸 아이디어는 미리 주민들을 모아 단체 온천 관광을 보내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해당 장면도 압권이었거니와 영화 역시 큰 성공을 거뒀다.

2023-06-09T18:07:50Z dg43tfdfdgf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