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뉴욕타임스 모멘트’

1968년 2월27일 CBS의 전설적 앵커인 월터 크롱카이트는 특집 방송을 진행하면서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미국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유일한 탈출구는 협상뿐입니다.”

그 세대의 저널리스트들이 대체로 그렇듯 크롱카이트는 공산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의 참혹한 현장을 직접 취재하고 돌아온 후 조속한 종전을 요구하는 쪽으로 완전히 입장을 바꾸게 된 것이다.

후에 전해진 일화에 따르면 이 방송을 집무실 TV로 시청하던 린든 존슨 대통령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크롱카이트를 잃은 것은 미국 민심 전체를 잃은 것이다.” 존슨 대통령은 이 방송이 나가고 한 달 뒤 그해 열리는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일화가 과장된 것이란 지적도 있지만, 방송 후 더욱 거세진 반전 시위가 재선이 유력했던 존슨 대통령의 불출마 선언에 큰 영향을 끼쳤으리란 점은 부인할 수 없다. CBS의 특집 방송은 ‘크롱카이트 모멘트’(Cronkite Moment)라 불리는 역사적 순간이 됐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무모한 도박을 하고 있다. 현재 그가 국가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봉사는 재선 불출마 선언을 하는 것이다.” 뉴욕타임스가 지난 28일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불출마를 촉구하는 사설을 발표했다.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대선 토론회가 끝나고 불과 19시간 후였다. 바이든 대통령은 토론 도중 자주 말을 더듬고 가끔은 생각의 흐름을 잃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 약점인 ‘고령 리스크’ 우려가 사실로 바뀐 순간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올드 그레이 레이디’(회색 머리칼의 노부인)로 불릴 만큼 신중한 뉴욕타임스가 대선이 5개월도 남지 않은 시점에 후보 교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미 정치전문지 폴리티코와 영국 가디언 등은 뉴욕타임스 사설이 ‘크롱카이트 모멘트’를 떠올리게 한다고 보도했다. 4년 전 대선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공개 지지했던 뉴욕타임스의 변화가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미 대선에 어떤 파장을 몰고 올지 궁금해진다.

정유진 논설위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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