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은 왜 보여선 안 되는가

[미디어스=윤광은 칼럼] 이 글은 에 관한 영화평이 아니다. 가해자의 일상을 보여주며 나치 홀로코스트에 접근하는 이 영화가 어떤 기획을 품고 있는지, 무엇이 탁월한지 알고 싶다면 이미 수두룩한 기사와 비평을 찾아보면 된다. 이 영화의 기획은 시각과 청각의 분리에 있다. 그것은 시각을 통해 재현될 수밖에 없는 매체인 영화를 통해 시각적 재현의 금기처럼 간주되는 유대인 수용소를 재현하는 난제에서 조너단 글레이저 감독이 내어 놓은 독창적 답안지다.

물론 그 기획이 정말로 성공했는지 물을 수 있다. ‘본다’는 것이 비윤리적 행위로서 금지된 대상을 다른 감각을 통해 우회하여 ‘보는’ 것은 과연 윤리적 행위일까? 그렇게까지 해서 그것을 스크린에 담으려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런 물음에 스스로 꼼꼼하게 대답하는 것도 영화 비평이 작성되는 방식이다. 다만, 여기서는 물음의 가장 밑바닥에 깔린 지층을 파헤쳐 보고 싶다.

왜 학살과 같은 비극을 재현하는 것은 경계되어야 하며, 그것을 ‘본다’는 행위는 왜 비난받는 것일까. 영화에서 ‘본다’는 것은 어떤 마력과 치명성을 품은 동사일까. 대안적 시각 재현을 탐색하는 무대로서 홀로코스트에 ‘도전’한 영화는 몇 년 전 개봉해 찬반 논쟁을 부른 같은 전례가 있다. 뿐만 아니라 재현의 윤리는 영화를 탐구하는 사람들의 유서 깊은 의제이다. 한국 영화계에서도 어떠한 영화가 공익을 폭로한다는 명분 아래 선정적 장면을 연출해 논란에 오른 사례가 많다. 이 글은 왜 볼 수 있는 것과 볼 수 없는 것이 나뉘어야 하는지, 무언가를 해내는 것도 아니고 ‘보지 않는다’는 소극적 행위가 어떻게 윤리적 실천이 되는지, 그 아래에 놓인 빈칸을 채워 가는 기록이 될 것이다.

영화는 현실을 복제하는 매체로 태어났다. 그것은 카메라가 '거기 존재하는 것', 렌즈 앞의 풍경과 움직임을 기록하는 기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무기는 현실의 리얼한 묘사라 인식되는 한편, 현실의 묘사에서 해방돼 재현의 가능성을 이루는 것이 과제로 제시되었다. 부재하는 허구를 존재하는 현실로 보여주는 것, 이 존재와 부재 사이의 심연이 영화란 매체의 환영성을 빚어낸다.

영화사의 리얼리즘에 관해 거칠게 말하자면, 관객이 환영성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그것을 은폐하는 흐름과 영화의 환영성을 고백하고 폭로하는 논의가 있었다. 재현의 윤리에 관한 논쟁이 불붙는 많은 연출이 섹스와 폭력, 고통과 죽음을 가시화하는 데 쓰인다는 건 의미심장하다. 그것들은 본능과 욕망과 실존의 정수, 생의 밑바닥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고, 실행하고 구경하는 것이 금기시된다. 실제로 일어나지 않은 것을 실제로 일어난 것처럼 '보여준다'는 영화의 속성은 저것들을 다루는 데 최적화되어 있다. 그래서 창작자들이 고통과 폭력, 죽음과 섹스의 땀구멍을 클로즈업하고 싶은 충동에 끌리는 것일지 모른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찍은 는 영화 속 강간 장면이 여배우와 상의 없이 촬영된 것이란 논란을 불렀다. 베르톨루치는 "나는 그녀가 분노와 수치심을 연기하길 원치 않았다. 진짜 분노와 수치심을 느끼길 원했다"라고 술회했다. 이런 발상은 꾸며낸 것이 아닌 순수한 진품을 원한다는 뜻으로 읽힌다. 뒤집어 말하면, 재현을 현실의 모상이자 현실보다 열등한 차선책으로 보는 관점을 깔고 있다. 이건 현실을 이데아의 모방, 예술을 이데아를 모방한 현실을 다시 모방한 것으로 폄하하던 수천 년 전 플라톤의 생각이다. 내가 이해하는 예술의 가치는 현실을 똑같이 묘사하거나 현실이 되는 데 있지 않다. 재현의 특권은 현실을 재해석하며 현실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고 '다른 현실'의 비전을 현현시키는 것이다.

고통과 재난의 이미지를 ‘보는’ 것은 종종 의로운 결단이나 불가피한 의무처럼 요청되고는 한다. 우리가 알아야만 하는 진실이 묻혀 있으며 날 것 그대로 현시되고 전파되어야 한다는 맹신이다. 그것은 타자의 비극을 최대한 아프게 받아들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시도다. 아무리 정신적 결의를 불태워도 편한 자리에 앉아 영화를 보는 ‘우리’는 수용소에서 죽어 간 ‘그들’이 될 수 없다. 그 영상을 보며 내가 그들의 자리에 가있다고 믿음을 강화할수록 오히려 ‘나’는 ‘그들’과 멀어진다. 이때 타자와의 메울 수 없는 거리에 대한 자각은 흐려진다. ‘나’는 그 영상을 보며 타자의 비극과 관계를 맺는다기보다, 그 영상을 통해 증폭된 ‘나’의 감정 속에 파묻힌다. 모든 종류의 재난 이미지, 고통스러운 이미지는 소비적 속성이 있다.

고통-이미지의 역치 갱신능력은 무한하다. 아픔과 공포, 비명을 내장한 고통-이미지는 우리에게 충격을 주어 각성을 일으킨다. 그 각성효과는 분명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그 차후에 똑같은 세기의 각성을 얻기 위해서는 그 이미지를 능가하는 더 큰 충격과 더 큰 자극이 동원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적 감흥은 새로운 것에 놀랍도록 빠르게 무뎌진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일수록 고통-이미지에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명제는 진실과 멀다. 타인의 고통을 실감하고 고통의 의미를 유추하기 위해 감각적 매개가 필요한 사람은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일 것이다. 인간에겐 나의 것이 아닌 고통도 내가 느끼는 고통과 다를 바 없다고, 겪지 않고 보지 않아도 ‘상상’하는 능력이 있다. 어떤 감각적 자극에 기대지 않아도 폭넓게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진정으로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아닐까.

말하자면, 고통-이미지를 감춤 없이 목격하는 순간, 우리는 이후 그보다 큰 감각적 충격을 주지 않는 사건이라면 그만큼의 비극으로 실감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므로 고통-이미지를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공감능력을 사수하는 적극적 결단이다. 뉴스와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이라면 간편하지만 위험한 ‘공감의 장치’에 의존하기보다, 지적 상상력을 끌어내는 대안적 재현방식을 모색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공감능력을 소진하지 않고 계발하는 길이다.

영화는 보는 자의 권력을 선사한다. 극장에서, 나는 세계를 살아내는 자가 아니라 세계의 구경꾼이다. 세상과 타인이 응시를 통해 대상화되어 개입의 가능성도 개입의 의무도 차단되는 그곳에선 고통도 죽음도 몰락도 모두 남의 일이다. 그것들이 가하는 육중하고 파괴적인 작용은 날아가고 관음의 실감만 남는다. 그러면서 관객은 주인공의 고통을 이해한다고 말하며 눈물짓는다. 바로 이 점이 영화 보기의 윤리학을 요청한다고 단정할 수 있다.

재현의 윤리가 폭력과 고통의 이미지를 우회하길 요청하는 것은 본다는 것이 그만큼 안전한 행위이고 그것들이 가진 무게감과 현실감을 오히려 소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적 영화란 무엇일까. 나는 이 물음에 보수적인 대답을 갖고 있다. 보는 것의 전능감이 아니라 볼 수 없음의 무력감을 선사하는 영화, 초월적 응시로 대상화된 그곳에서조차 그렇게 쉽게 안다고 말해선 안 되는 타자와 존엄과 비밀이 있다고 일깨우는 영화가 아닐까.

홀로코스트는 서양 문명사의 지평 위에서 접근이 차단된 절대적 타자의 심연으로 괄호 쳐진 장소다. 나는 그것의 위상이 상대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인류사 폭력의 기록은 홀로코스트란 특정한 사건에 한정되지 않는다. 말하자면, 복수의 역사가 있고 복수의 비극과 복수의 타자와 복수의 존엄이 있다. 이 명제를 되새기면서 재현의 규범을 고심하고 가까이 있는 사례들을 비춰 보는 것이 지금 이곳에서 영화를 통해 윤리를 사유할 수 있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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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6-21T23:05:57Z dg43tfdfdgfd